절망의 끝에서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는 대신
꺽꺽거리는 목울음 삼키며 그냥 견뎌보기로 하다.
그 여자 최부용, 사랑 없이 살아낼 수 있을까?
스물한 살, 앳된 나이에 진페증에 걸린 사슴 같은 언니를 뒤로 하고 삼천만 원에 인생을 저당 잡힌 하얼빈 조선족 처녀 부용은 남편이 바보여서 서러운 것은 아니었다. 남편의 천치(?癡)스러움이 천진(?眞)으로 받아들여지고 그의 살내음이 싫지 않았을 때는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약하고 하찮은 것들의 사랑이어도 사랑은 사랑이니까. 그러나 이곳은 대한민국, 5,000년의 순혈을 자랑하고 강한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곳에서 조선족 계집애의 사랑이 가당키나 할까?
“한국에 사는 게 왜 중요하냐는 건, 돈 버러지처럼 돈 찾아 왔으니 돈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뜻이겠지요. 물론 맞습니다. 그런데요, 사람한테 돈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벌고 싶은 것이지 돈을 위해 돈을 버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사람입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오래 오래 고심한 끝에 한국을 선택한 거예요. 얼마든, 고영라씨 돈은 필요 없습니다. 제 힘으로 살겠습니다. 이렇게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지금보다 더 가난해지기야 하겠습니까? 제 뜻을 분명히 말씀 드렸으니 그만 가보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_본문 중에서 228쪽
겸의 손이 젖가슴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더듬는다. 부용은 거칠게 뿌리치고 싶은 심사를 간신히 다스린다. 부용에게는 그 세 사람보다 남겸이 문제였다. 눈에 덮여가는 자동차 속에서 고영라와 술 마시며 섹스를 했던 그였다. 그리고 끌어안고 잠들었다가 저 혼자 빠져나왔던 것이다. 고영라를 그곳에 버려두고 와버린, 그러고 나서 고영라를 잊어버린 남겸은 순진무구한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괴물이었다.
_본문 중에서 322쪽
한 때는 별처럼 어여뻤던 남겸이었다. 하지만 그가 최부용의 별이기도 하다는 말이 지금은 빈말로라도 나오지 않는다. 지후니가 자신의 별이 아니게 된지도 여러 달 되었다는 말도 못 했다. 아름다운 것이 강하고 강한 것이 아름답다! 그 문구에 생기는 날카로운 반발심까지 덩달아 쏟아질 것 같지 않은가. 조선족 계집애 최부용에게 보였던 한국이 강하고 아름다웠다고, 지후니가 그랬다고. 그래서 강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한 것들은 어쩌라는 것이냐고 바락바락 소리치고 싶은 것이다.
_본문 중에서 328쪽
그 남자 남겸, 사랑을 알게 되는 날이 올까?
중등도 지체자 남겸은 아픔과 슬픔이라는 감정도 가르쳐야만 하는 천하의 바보다. 인간 구실하며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끈기와 인내로 하라는 것은 제대로 못해도 하지 말라는 것은 죽어도 하지 않으며 하백당이라는 안전한 울타리에서 마흔 남짓을 살았다. 어느 날 나타난 우렁이각시가 평생의 반려라는 것은 알지만 그녀를 두고 고영라와 살을 섞는 것이 잘못인 줄은 모른다. 고영라가 죽어도 바보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그이기에 책임도 없다.
2월 22일 목요일. 바람 조금 불고 눈이 약간 내리다가 금세 녹았다.
오후에 하백당 마당을 쓸고 있는데 차 소리가 났다. 면이가 왔다. 빨간 웃옷에 청바지를 입은 조그만 여자랑 같이 왔다. 그 여자는 그때, 그때 중국 식당에서 보았던 우렁이각시였다. 내 가슴이 쿵쿵쿵 마구 뛰어서 기분이 좀 수상했다.
우렁이각시는 어머니가 없다. 나는 아버지가 없다. 옛날에 돌아가셨다. 우렁이각시가 할머니하고 어머니한테 절하고 나서 자꾸 울었다. 우리 할머니랑 어머니도 같이 울었다. 그래서 나는 안방에 있기 무서워 도망갔다. 도망가다가 식당 앞에서 고영라를 만났다. 고영라한테 우렁이각시가 왔다고 자랑했다. 고영라가 좋겠다고 하면서 웃었다.
오늘 시 : 높은 가지는 바람에 소리를 곧잘 내고 빽빽한 잎새에 때로는 꽃처럼 눈이 쌓이는데, 어젯밤 달님 한껏 멋을 부려 비단 창문에 성긴 대나무 그림자 데리고 지나가셨다네.
_본문 중에서 31쪽
그 겸이 불쑥 주스 통을 건네주고 문을 열고 나간다. 차 뒤쪽으로 몇 걸음 가더니 호수 쪽을 향해 선다. 소변이 마려웠던가. 그러고보면 겸이 오줌 누는 걸 보는 게 처음이다. 아파트에 드나들 때 그는 화장실에 간 적이 없었다. 그만큼 고영라한테 머문 시간이 짧았던 것이다. 아침마다 찾아와 놀이하듯 살을 섞고 유치원 선생에게 인사하듯 낼 또 올게, 하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
영라는 전조등을 켜서 주변의 어둠을 덜어내고 실온을 높여놓고 겸을 뒷자리로 이끌었다. 주스 세 통엔 진이 두 병쯤 섞여있었다. 그 술을 둘이 다 나눠 마셨다. 겸이 마신 술이 더 많았다. 몽롱하고 따뜻하다. 자동차 모양새의 동굴이 있다면 이럴까. 동굴에 불을 지피고 눈 내리는 바깥을 내다보는 원시인이 된 것 같았다. 좁지 않았다. 겸은 영라의 손짓에 아이처럼 환호하며 달려들었다. 서로의 옷을 벗기고 서로를 짓누르며 뒤치면서 둘은 짙게, 오래 엉켰다.
_본문 중에서 312쪽
조선족 계집은 그냥 그 계급으로 살면 된다.
일류대를 나와 변호사로서 승승가도를 달리는 바보의 동생, 호남 제일 수재 남면이 가족이기에 천형(?刑) 같은 자신의 형을 품어 안는다고 하더라도 돈 삼천 만원에 사온 자신의 형수에 이르러서는 문제가 달라진다. 지각 있는 지식인, 가슴에 아련한 여인 하나를 품고 있는 그지만, 부용은 한 명의 인격체라기보다는 병든 노모의 수발을 들고 바보 형을 보살펴 줄 가정부이며 드러나지 않는 그림자여야 했다.
고영라를 만났던 날 밤. 남실이, 혹시 겸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온 사실이 있냐고 묻기에 부용은 검진 받은 사실을 밝혔다. 시누이 얼굴이 굳어졌던 걸 그때는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저 남실이 미안하다고, 아이는 나중에 인공수정을 해서라도 낳으라고 해 주는 걸 고마워했다. 그런데 그때 이후로 달라졌다. 외출할 짬이 일체 없어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신용카드사용 방법도 달라졌다. 시누이가 돌아간 다음 날로 현금인출이 가능하던 신용카드가 폐쇄되더니 며칠 만에 다른 카드가 왔다. 물건을 살 수는 있되 현금을 인출할 수는 없는 직불카드였다. 외출할 짬이 없으니 따로 돈이 필요하지 않았고, 겸의 목각인형을 절에 팔아 모아 둔 비상금이 있는 탓에 불편할 것은 없었다. 일종의 징벌기간이므로 자숙해야 한다는 걸 체감하는 나날이 굴욕스럽고 씁쓸할 뿐이었다.
_본문 중에서 244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려 기를 쓰는 중이었다. 고영라의 식당 조선시대도 여전히 성업 중이지 않냐고, 그럼에도 견디기 힘든 까닭 중 한 가지가 ‘조선시대’의 여전함이었다. 주인이 사라졌는데 그대로라니. 두렵다는 게 맞을 터였다. 할머니 홍인덕이 사라져도 끄떡없는 하백당에 최부용이 사라지는 것쯤 사건이기나 하겠는가. 생각이 거기 이르자 고영라가 동사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고영라는 하백당에, 하백당 같은 어떤 대상에 맞섰기 때문에 눈 더미 속에 파묻혔다. 최부용 또한 언제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최부용이 현재 자리에서 죽은 듯이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죽은 듯 살면서, 가능한 시간에 잠이나 잘 수밖에. 부용은 어둠 속에서 부릅뜨고 있던 눈을 감는다.
_본문 중에서 324쪽
불현듯 바보가 탐이 났다. 아니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리라. 대대로 하백당의 문지기로 살아온 그네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격지심이 반발을 일으킨 것이리라. 남의 남자라 해도 자신이 사랑한다면, 더구나 상대가 젖비린내 나는, 돈에 팔려온 조선족이라면 겸과 하백당을 고영라가 차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겸의 한 여자로 최부용이 나타났다.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라던가. 속내가 어린 동무와 맞춤하게 나이어린 동무의 아내는 귀여웠다. 겸의 오래된 자전거 옆에서 수시로 함께 달리는 부용의 은빛 자전거는 봄볕 속 새순 돋은 나뭇가지처럼 반짝거렸다. 저 은빛이 바랠 즈음 저들은 닮아 있겠구나, 자신의 가게 앞을 지나가는 그들 부부를 창을 통해 지켜보노라면 흐뭇했다.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야릇한 감정도 돋았다. 서운함이랄까. 시새움이랄까. 일종의 통증 같은 것이었다. 분명히 남겸을 남자로 본 적이 없었다. 남자라니. 그가 자신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던 열일곱 살 무렵에 느꼈던 황당함은 그도 사내라는 의식이 아니라 익숙하고도 두려운 혐오감이었다.
_<그대의 맨발에 입을 맞춥니다> 중 196쪽
영라는 급작스레 절박해 졌다. 스스로를 시험하는 기분이랄까. 이 시험을 가볍게 통과하고 나면 면도 하백당도 다 버리고 가볍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것이다. 절박함이 통했을까. 겸이 뒤를 돌아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_본문 중에서 305쪽
작가 후기 중에서
여기서도 사랑에 관해 물으려던 건 아니었다. 사랑을 이야기 하려던 것도 아니다. ‘결혼 이주민 여성’으로 불리는 사람들. 꿈을 좇아 찾아든 이방(異邦)에서 꿈을 이루려 애쓰는 젊은 삶에 대해 이야기 하려 했다. 스스로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 줄 깨닫지 못한 채 별처럼 빛나는 것들을 향해 줄달음치는 젊음과 그 젊음을 맞아들인 ‘우리들’의 삶을, 하얼빈 출신의 조선족 여성을 통해 그려보고자 했다. 한국의 대 스타 ‘비’를 좋아하는 최부용, 희망 없는 현실을 벗어나 이상향처럼 보이던 한국을 찾아온 그. 한국에 오기 위해 선택한 결혼과 이방인으로서의 삶. 사방에 잠복돼 있다가 삶의 발목을 잡아채는 덫들.
따라서 《사랑을 묻다》에 이른바 사랑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여지가 처음에는 거의 없었다. 사랑으로 부용의 삶을 희석시키지 않을 작정이었다. 부용이 마주한 유, 무형의 온갖 편견과 억압들에 맞장 뜨듯 대들어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부용의 꿈과 삶, 그 빛남과 쓸쓸함에 관해 얘길 하자니 날마다 먹지 않으면 안 되는 밥처럼 사랑이 필요했다. 사랑이 아니라면 이방인인 부용이, 너무 젊은 그가 살아내야 하는 삶이 혹독했기 때문이다.